지난 달 부산에 다녀왔다.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고, 가족사진을 찍고, 2년 만에 만난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의 시간이었지만 오후엔 혼자 집을 나와 카페에서 글을 썼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글이 안 써졌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그랬다. 몇 번이나 책상 앞에 앉았지만, 왜인지 제자리 걸음이었다.
쓰다만 글이 다섯 개. 한편의 에세이를 쓰는데 보통 짧으면 하루, 길어도 3일 정도였는데 갑자기 글이 안 써졌다. 어떤 주제의 글을 썼다가 다른 주제의 글을 썼다가.. 애매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글만 여럿 쌓여갔다. 왜 이러지, 지난 몇 달 동안 에너지를 다 쓴 걸까, 피로가 쌓인 탓일까. 아니면 슬럼프 같은 것일까..
뭐랄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별로 없다. 평소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고민이 넘쳐나는 편인데, 요즘은 별 생각이 없다. 그래서인지 잠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논다. 멍하니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별 생각이 없으니 별 자극이 없어서 뭘 봐도 뭘 해도 무념무상이다. 딱히 별일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
다만 문제가 조금 있는데, 크고 작은 실수를 많이 한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화분을 깨먹기도 하고, 쓰레기 재활용을 잘못해서 다시 돌아 나가기도 하고 배달 음식을 친구 집으로 보내버리는 등.. 자잘한 실수들이 잦다. 분명 며칠 전에 생각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기한이 지나서야 아차, 하고 깨닫는 것도 여러 번. 원체 실수를 잘 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웬만한 상황마다 머릿속에 미리 계획을 착착 세우고 실행하는 성격인데, 요즘의 나는 살짝 나사가 빠져있는 것 같다. 근데 그런 상황이 생기면 자책하고 화나고 짜증 날 법도 한데, 그냥 에이 뭐, 됐다. 그러려니 하고 빠르게 포기하거나 해결책을 찾아 행동하고 있다.
작은 실수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부끄러울 큰 사건도 있었는데, 프리랜서 9년 생활 동안 큰 오점으로 남을 만한 일이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내 잘못이었다. 씁쓸하고 속상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로 인한 다음 스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책하고 후회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 내가 저지른 일, 누굴 탓하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과하고, 반성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어떤 실수든 해결하는 데는 돈과 시간과 정신력 체력이 모두 곱절로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엇이든 대가가 필요한 거니까. 책임을 지고, 흘려보내기로 한다.
요즘의 이 상태가 나는 썩 탐탁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것도 같다.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며, 서툴고 게으르다.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적고 삶의 굴곡도 줄어들었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남들에게 뒤처지면 어떡하려고’ … 이런 마음을 다 접어두고 콧노래를 부르며 대자로 누워 심심해하는 기분이랄까.
내 능력의 한계를 알 것.
내 체력의 한계를 둘 것.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 것.
나는, 작은 인간이다.
‘나는 작다.’
이상하게 요즘 이 문장을 곱씹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 엄청난 대작을 그려내지 않아도 돼, 대단한 글을 써내지 않아도 돼, 멋진 옷을 차려입거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어도 돼, 갖지 못할 부를 갈망하지 않아도 돼, 누군가를 꼭 사랑하지 않아도 돼, 가족에게 대단한 힘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괜찮아…
우주의 푸른 점, 지구의 한 톨 먼지, 그조차도 되지 않는 사람 한 명. 나라는 존재… 뭐 이런 철학적이고 과학에 의거한 거창한 마음가짐은 아니지만, 조금은 <오버뷰 이펙트>의 시선으로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이 글은 딱 세 시간 동안 썼다. 못다 쓴 다섯 개의 글은 나도 모르게 자꾸 대단한 교훈이나 깨달음 따위를 이끌어 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그냥 손이 가는 데로 썼다. 오늘은 청소와 빨래를 반만 했고, 냉동실에 얼려둔 치킨을 데워 먹었고, 머리를 감지 않았다. 대충 살았듯, 글도 대충 써보았다. 지금 이 ‘오늘의 에세이’가 신중하게 써왔던 다른 글들에 비해 조금은 아쉬울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은 이런 글쓰기를 해본 것도 괜찮은 거 같다. 방금 나는, 글을 쓰는 건 역시 즐겁구나- 라고 아주 작게나마 느꼈기 때문에.
외로워도, 게을러도, 못해도, 포기해도, 잊어도,
그냥 두어도,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는 작은 한 사람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