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거창하지만 또 단순하기도 한. 너무나 뻔하지만 또 그만큼 희귀한 단어.
불과 두 달 전의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딱히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답답함과 공허함, 불안함과 무료함, 질투와 자책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둘러싸여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별로라는 자각을 할 만큼 정신적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던 내가, 요즘은 꽤 좋다. 매일매일 웃고, 매일매일이 소중하다. 오늘이 충만하고 내일이 기대된다. 이렇게 완전히 바뀌어버리다니. 고작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돌아보니, 조심스럽지만 감히- 행복의 조건이란 사실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1. 환경의 확장
평소 생활 반경이 집, 카페, 동네뿐인 나인데 급기야 겨울이 되면 춥다는 이유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들이 길어진다. 겨울마다 그랬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마다 몸이 아프다. 추위에 떨면 고통스럽다고 느낄 만큼 괴롭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다. 몸은 점점 게을러져서 좁은 방과 이불 속에서 동굴에 숨어 살듯 버티곤 했다. 안 그래도 혼자 오래 살아온 집, 모든 게 나뿐인 집에서 나만을 보고 나만을 케어하며 살다 보면, 의식하지도 못하게 천천히 고립되어 간다. 흠흠, 기침 소리조차 목이 메일만큼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뇌 속에서만 생각이 굴러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심연으로 빠져든다.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알 수 없게끔 저 어딘가로, 더 깊고 어둡게.
대부분의 겨울이 그랬다. 봄여름 가을을 열심히 살다가 날이 서늘해지는 순간부터 나는 지레 겨울이 무서웠다. 1년의 반 정도가 추운 터라 더더욱 그 긴 시간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상하게도 항상 11월부터 2월까지는 일도 없었다. 외주가 뚝 끊겨서 다음 달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도 매번 보릿고개였다. 프리랜서로 사는 11년 내내 매번, 매년.
올해 겨울도 사실 마찬가지다. 11월을 기점으로 모든 외주가 끝나자, 또 어김없이 일이 없다. 백수나 마찬가지라 모아둔 돈을 조금씩 까먹으며 버텨야 하는 건 똑같지만, 11년 만에 처음으로- 이번 겨울은 무료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또 다른 공간, 작업실을 구했기 때문이다.
요즘 집은 잠만 자고 씻고 쉬는 곳이 되었다. 느지막한 오전에 눈을 뜨면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들을 잠시 돌보다, 씻고 준비한 뒤 바로 작업실로 간다. 마감도 없고 의뢰받은 일도 없지만, 작업실에 가서 뭐든 한다. 걸어서 20분, 택시로 5분 거리.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번화가 한복판인 우리 동네에서 이만큼만 나와도 이렇게 한적하고 차분한 동네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2. 사람들과의 시간
시작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기운 하나 없던 10월의 어느 날, 동네 책방 사장님을 통해서 어떤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같이 작업실을 구해보자고 단합했다. 금액이 부담되어 포기해야만 했던 공간 욕심을 다시 한번 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심은 결심일 뿐..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정말 연남-연희-성산-서교- 일대의 모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온갖 부동산을 방문하고 수시로 직거래 매물들을 확인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맞는 곳은 없었다. 보증금과 월세가 지나치게 비싸거나, 평수가 너무 작거나, 권리금이나 시설 문제 등… 마음에 들고 안 드는 걸 떠나 우리의 자그마한 통장 상태에 허락되는 공간은 없었다.
보름이 넘어가면서 슬슬 지치고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하나… 하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게시물. 사진만으로는 확인이 애매했고 위치가 생각했던 범위 밖이었지만, 그냥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2층 건물. 입구에서까지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앗. 하는 마음으로 깨달았다. 여기구나, 우리가 찾던 곳이.
바로 공간을 계약하고, 기존 세입자와 양도 거래를 조율하고, 이사 날을 확정했다. 그리고 2명의 동료를 더 구해, 4명이서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인수받는 날, 집기가 다 빠져나간 텅 빈 공간에서 큰 숨 한번 내쉬어보곤 바로 으쌰 으쌰 힘을 내어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핸디 코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조명을 달고 못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은 옷차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신문지 위에서 피자를 나눠 먹기도 하면서, 힘든 것도 잊고 깔깔깔 웃으며 같이 공사를 했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나름의 방법으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채우고 만들어낸 공간에서 거의 매일같이 모였다. 각자의 작업 고민도 이야기하고 또 사람들도 여럿 초대했다. 찾아온 사람들마다 너무 멋진 작업실이라고 할 때마다 우리는 한껏 뿌듯해하며, 언제든지 누군가를 불러 편안하고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음에 기뻐했다. 때마침 연말 12월을 맞아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서로를 알아가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보고 놀이터로 달려나가 어린아이들처럼 놀았던 이브의 밤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작업실을 구하려고 작가님과 동네 곳곳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시간도 참 재밌었고 동료들과 즐거운 노동과 당근 거래에 진심으로 임했던 여러 사건들도 참 웃겼다. 작업실에 찾아와 준 서로의 지인들과 또 서로 친구가 되어 밤새 수다를 떨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또 웃던- 지난 한 달 내내, 정말 많이도 웃은 것 같다. 사소한 웃음부터 커다란 폭소까지 가득 넘쳐흘러서 우울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매일매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