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는 게 평탄하다 못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다. 평탄하다고 하기에는 매일 해야 할 일들을 계산하고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고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못 이루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이 힘들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괴로워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그것을 깊게 생각해버리면 한없이 곤두박질 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외면하고 있다.
호흡이 어려워 약을 먹은 지 오래되었다. 2년 넘게 잔기침이 멈추질 않아 작년부터는 천식 치료용 흡입제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해봐도 큰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숨이 꽉 차는 게 명확하게 느껴지고 며칠 전에는 위쪽 명치가 답답하고 아파서 무섭기까지 했다. 병원에 가봐야겠지만, 또 가야겠지만, 병원에 가도 별다른 해결책 없이 똑같은 약만 처방받을 텐데 싶다. 추측건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생각할 뿐.
몸이 점점 낡아가고, 여기저기 건강이 좋지 않음을 인지할 때마다 느낀다. 나이를 먹고 있다. 푹 자기만 해도 회복하던 시절은 끝났다. 앞으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약을 계속 먹어야 하거나 여기저기 아플 것이다. 주위 지인들이 하나둘 암에 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더 심란해진다. 나도 아프다는 것을 말할 사람이 별로 없다.
나를 걱정하듯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그 마음을 내비치지도 않는 나를 생각하면 서글프다. 문자 하나, 전화 한번 하기가 망설여진다. 그저 걱정하고, 염려되고, 뭐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하고 오해받는 상황이 쌓일 때마다 이젠 두렵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듯한 태도와 네가 도울 게 뭐가 있겠냐는 암묵적 대답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인연이 사라질 때마다, 애정이 바스러져 버릴 때마다 내가 걱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더 웨일’ The whale 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 (어떤 지점에서 왜 울었는지,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다. 좋은 리뷰들이 많으니 꼭 찾아 읽어보길.) 몸을 움직이기도 벅찰 만큼 거구의 주인공. 그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이 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 하세요, 라는 말 따위 무용하다. 그의 이야기는 예정된 미래, 죽음을 향해 간다. 그 옆에는 친구 리즈가 있다. 그를 간호하고 수술을 권유하면서도 결국은 핫도그 피자 같은 것을 주고 만다. 절대 그를 동정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계속 옆에 머문다. 전도를 하려고 찾아온 소년도, 아빠가 너무 미운 엘리도, 어떻게든 결국 서로를 계속 마주하고 끝까지 매달린다. 그들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나아질 것 하나 없이, 곧 죽을 것이 너무도 뻔한 찰리의 곁에서.
" I think I need to accept that
my life isn't going to be very exciting,"
"흥미진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거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
에세이 글쓰기 강사인 찰리의 학생 한 명이 쓴 글이었다. 이 글을 쓴 그는 젊고 건강했으리라. 하지만 일찍이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뻔한 삶의 전개를.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문장에 숨어있다. 사실은 흥미진진한 인생을 바란다는 것. 그것이 아주아주 작고 작은, 보이지도 않는, 존재하는 지도 모를 먼지 같은 희망일지라도. 일주일 후에 죽을 찰리 또한 흥미진진한 인생 따위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모질기만 한 딸 엘리에게 계속해서 말한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너무 멋진 딸이야.’ 찰리는 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죽기 전에 삶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죽기 직전에 읽어달라는 모비딕의 에세이처럼,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매달리면서.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나도 용기를 냈던 적이 있다. 당신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에게 구원받고 싶었다. 결국 그 관계는 무너졌지만 나는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다. 언젠가 또 그런 만남이 있다면 나는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신을 믿지 않기에 사람을 믿는다. 누군가를 알아보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 최선을 다해 서로를 들여다 봐주고 곁에 남아주는 일. 돌아보니 나의 구원은 용기였다. 몇 번의 용기를 낸 이후의 나는 요즘 그저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나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흥미진진한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가끔, 지루한 삶 속으로 특별한 문장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이 얼마 전 북토크에서도 있었다. 마지막 인사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에서
저는 ‘살릴 거야’의 의미를 더 마음에 둬요.
여러분에게도 그런 의미가 되기를.”
내 이야기에 사람들이 되돌려주는 용기가 요즘 나의 구원이다. 내 책을, 내 글을, 내 편지를 읽고 기뻐하고 감동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무력에서 벗어나고,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한번 힘을 냈다는 말. 나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는 타인을 접할 때마다 놀랍다. 나의 걱정과 염려와 응원이 어딘가에 닿는구나. 누군가에게는 분명하게 닿고 있다. 아주 조용하고 가만하게 천천히.
우리는 비밀스럽게 서로를 구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찰리가 울부짖으며 내뱉은 간절함을 떠올린다.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