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재능과 집안 환경 덕에 천재 야구선수라고 평가받는 칠봉이가 사실은 엄청난 노력파였다는 에피소드에 <1만 시간의 법칙>이 나왔다. 너무 유명한 법칙 중 하나였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성공한 사람, 천재들의 능력이 쉽게 얻어진 게 아니라고 할 때 꼭 나오는 말이니까. ‘죽어라고 많이 해라’ ‘1만 시간은 해보고 말해라’ 그런 거지 뭐. 재능 없다 핑계 대지 말고 노력이 중요하다는 거, 뻔하고 당연한 그런 거 나도 알거든, 하고 괜스레 투덜거렸다.
문득, 그럼 나는 1만 시간을 들이지 않았나? 그런 노력을 안해서 이 말에 빈정이 상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보았다. 맬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1만 시간의 법칙>은 1993년 “전문 역량 습득에 대한 의도적 연습의 역할”에 대한 논문의 결론이었다. 독일 서베를린 뮤직 아카데미의 바이올린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였고, 연구진은 20살 전후의 학생들을 3종류로 나누었다.
‘세계적 프로 연주자가 될 사람’
‘우수한 학생’
‘선생 정도 될 사람’.
대상인 학생들은 5세 전후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한 비슷한 조건의 집단이었고 기준은 딱 하나였다. 연습 시간. 평범한 학생들은 3-4천 시간, 우수한 학생들은 7-8천 시간인 것에 비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 학생들은 연습량이 ‘1만 시간’에 달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의 대상으로도 조사를 해보니 실력의 차이는 연습 시간의 차이로 나타났고 그 누구도 연습량에 비례하지 않고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어떤 분야에서 월등히 뛰어난 어느 시점에 오르기까지는 최소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이 연구 내용을 살펴보다 순간 조금 울컥했다. 만약 내가 저 연구 대상자 학생 중 한 명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당연히 ‘세계적 프로 연주자가 될 사람’이고 싶지만, ‘우수한 학생’이거나 혹은 ‘선생이나 될 사람’으로 평가받았을 확률이 높다. 나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평가를 받으면 너무 화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니가 연습을 덜했잖아?’ 하는 말만 돌아왔을 것이고 게으른 자신을 탓하며 자괴감만 더했을 것이다. 만약, ‘세계적 프로 연주자’가 될 거라는 평가를 받으면 우쭐할까, 아니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될까. ‘우수한 학생’이라고 하면 ‘네가 잘하긴 하지만 성공한 연주자가 되지는 못할 거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까. ‘넌 고작 선생이나 될 거’라는 말을 들으면- 포기하고 싶어지진 않을까.
세상이 주목하는 건 언제나 성공한 이들이다. 천재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부러움을 산다. 그들의 성공과 반짝임, 성취, 물론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들을 추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다. 보통은 그냥 잘 하는 사람, 그냥 할 줄 아는 사람 정도. 저 3등급 평가의 해석도 기분이 나쁘다. ‘선생이나 될’ 사람이라니! 선생이 뭐 어때서? 뛰어난 아티스트에게는 언제나 뛰어난 스승이 존재했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배우고 갈고닦기 위해서는 멘토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통해 배우고 익혀왔다.
노력은 자명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 또한 마냥 좋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더욱 잘 그리고 싶어지자 그리고 싶지 않은 것들도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야 했다. 고도의 집중력과 수많은 시간을 들여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익혀야 했다. 힘겨웠고 어려웠다. 하지만 그 반복된 연습으로 인해 더 잘 그리게 되었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탄탄하게 갖춰진 기본기는 몸에 밴 근육처럼 단단하게 남아 그 위에 무엇이든 살을 붙여 특별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껏 그린 그림의 총량은 얼마일까. 단언컨대 1만 장은 충분히 넘는다. 하루에 3시간씩 한다고 하면 1만 시간까지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의식하고 그린 그림은 중학교 때부터고, 연습과 단련이라고 의식하고 그린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니까 10년은 이미 훌쩍 넘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하루에 10시간 넘게 그린 날들이 수없이 많다. 나는 분명 이미 1만 시간을 넘어섰다. 그런데 아직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왜일까. 이 법칙에는 논란이 많다. 단순하게 누구나 1만 시간을 연습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대상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천적 재능도 필요한데, 노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환경까지 있어야지만 비로소 ‘연습’ 할 시간이 가능하다는 반론이 주어진다. 거기에 더해 그 ‘연습’의 정도 또한 단순히 행동하는 것이 아닌 고도로 신중하게 계획된 ‘완벽한 의도적 연습’만이 1만 시간에 포함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연습에도 질이 있고, 시간을 때우기 위한 단순한 반복이 아닌 높은 집중력과 계산된 습득만이 ‘진짜 노력’에 포함된다는 것... 평범한 개인이 억지로 1만 시간을 어설프게 채워봤자 천재가 될 수는 없다는 말... 그렇다면 나는 평범한 인간이던가, 환경이 받쳐주지 않았던가, 내 연습이 질이 떨어졌던가. 그중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겠다. 모두 다일 지도 모른다. 나는 적당한 재능으로 적당한 환경에서 적당한 연습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아직 멀었어, 더욱 노력해,라는 말은 사람을 응원하는 동시에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위플래시가 떠오른다.) 그간의 노력이 저평가되고 나의 한계가 느껴지고, 환경과 자질에 의심을 품게 된다. 노력하지 않았다면 핑계를 댈 수 없지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나는 저 말을 그저 ‘조급해 말고 꾸준히 합시다’ 정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법칙을 반드시 믿을 필요도 따를 필요도 없다. 노력하는 태도 자체를 지켜내며, 지난 노력이 헛된 발버둥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계속할 수 있다. 시간을 일일이 재가며 막막한 수치를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만큼 발을 딛고 손을 움직이는 것이 현재의 노력 아닐까. 높게 멀리 보되 앞을 향해 나아가야 지치지 않는다. 내가 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 처음 시작했던 순수함, 나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응원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이 진짜 방법이다.
우리의 삶은 1만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1만 시간을 노력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게으름과 1만 시간의 좌절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 시간을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 ‘노력한 1만 시간’ 만큼 ‘노력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들 또한 분명 의미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