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서교동의 한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원래는 별 것 아닐 이 일상이, 지금의 저에겐 낯설고 속상하기만 하네요. 원래 이 레터를 포르투에서 쓰려고 생각했거든요.
2023년 상반기도 열심히 달려온 만큼, 저는 8월 한달동안 포르투에서 한달 살기를 계획했었습니다. 몇달째 이어가며 빼곡하게 채워둔 업무들을 7월 말까지 어떻게든 해내려는 원동력도, 여행가서 맘껏 즐기고 쉴 수 있을 돈과 시간을 버는 것이었기에 힘들지 않았어요. <여행의 장면> 북토크와 강연 자리에서도 쿠바 이야기를 실컷 하다가 저는 곧 포르투로 떠날 거라며, 또 좋은 여행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올게요! 라고 한껏 자랑하곤 했었죠. 일년에 한번, 삶을 리프레쉬하는 여행, 행복하고 풍성한 여름을 기대했었지요.
하지만 이번 8월은 잔인하리만치 계속해서 실패와 좌절들이 이어졌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지 못했고 여행 계획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항과 일본 경유지에서만 2주를 허비하고, 돈은 돈대로 쓰며 헛돈을 날리고,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귀국하는 과정마저도 순조롭지 못해서, 천재지변과 지인의 부고 등등,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이상하리만치 저를 막아섰어요. 평생 겪어본 적 없는 태풍 결항까지 통보받은 순간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그간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어떡하지? 오늘 밤에 나는 어디서 자게 될까?' 한치 앞도 모르는 매일 매일을 2주간 겪으며, 빼곡한 계획으로 채워졌던 머리속은 점점 멍해져갔어요. 계획형 인간, 대문자 J인 나에게 계획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은, 답답함을 넘어서 무기력으로 찾아왔습니다. 아, 해결하는 방법이 딱 한가지 있긴 했어요. 바로 ’돈을 많이 쓰는 것‘이었죠. 하지만 ’많은 돈‘이 없는 저에겐 선택이 아닌 결정만이 남아있었죠. 이미 최대치로 쓸만큼 써보고 할만큼 했기에, 이젠 어쩔 수 없다. 포기하고 돌아가자. 라는 결론이- 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내 탓도 아니었어요. 원인이 있기는 했지만 이유는 없었어요. 그저 그냥, 그렇게 된 것 뿐이었어요. 살다보면 그런 것들이 있어요. 내가 뭘 잘하지도 잘 못하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닥쳐온 일을 그냥 겪어야만 할 때가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지만,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것들이요. 사실 삶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구요.
서울에 와서도 모종의 이유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집을 전전하며 그저 자고, 먹고, 무언가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우울감이 극도로 진해지는 것을 느끼며 깨달았어요. 내게 제일 나쁜 영향을 주는 감정은 바로 무기력이라는 것을요.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되자, 나라는 존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어요. 무언가를 해야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음을. 어떻게든 해야하는데, 무엇도 하고 싶지가 않음을. 불가항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나 자신이 어찌나 초라하고 보잘것 없던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걸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질문을 내내 곱씹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니- 이젠 무기력 조차도 덤덤해졌어요. 새삼 생각했어요.
‘나는 여전히 나를, 삶을 모르는구나.’
이런 상상도 해봤어요. 무사히 여행을 갔는데- 이것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어떤 일이 나에게 닥칠 운명이어서, 그걸 막으려고 세상이 나에게 ‘적당히 견딜 수 있을 만큼만의 시련’을 준 것은 아닐까? 지금의 불행이 사실은 행운이었다면? 그럴지도 모른다고요. 물론 더 큰 불행이라는 것은 작은 불행을 통해 피해갔기에 존재하지 않고, 결국은 겪지 못했으므로 지금의 이 지루함과 공허함이 행운인지 운명인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 뿐이예요. ’삶이 그렇지 뭐.‘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이면서요.
잘 생각해보면 엄청난 불행까지는 아니잖아요. 죽지도 다치지도, 재산을 홀랑 날리지도, 직업을 잃거나 생계를 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바래왔던 한달치 계획과 여행의 기쁨을 얻지 못한 정도였지요. 그건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예요. 마음은 괴롭지만, 원하는 건 얻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을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이미 가진 것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힘겹게 앉아- 몇 주만에 다시 글을 쓰게 되었어요.
사실 커피 한잔을 시켜두고 앉았는데, 글을 쓸 에너지가 안 나서 빈 화면을 삼십분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2023년 하반기 계획을 다시 정리해봤어요. 외주 4개를 해내야 하고, 100일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하고.. 강연과 출간 기획.. 하나하나 써봤어요. 아, 무엇보다 중요한 일정이 하나 있는데, 9월 4일부터 알라딘 [투비컨티뉴]에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사실 이건 저의 ‘첫 연재작’ 인데요. 어디서도 깊게 다뤄본 적 없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10회를 예상하고 기획안을 썼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계획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그 이후에 저는 또 다른 한걸음을 나아가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계획, 계획..ㅎㅎ 계획이라는 게 얼마나 무력한지, 결코 마음처럼 생각처럼 잘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뼈저리게 겪었으면서도 저는 또 계획을 세우고 있네요. 오늘의 할일, 이번 주, 이번 달, 다음 달, 그리고 내년- 멀리는 삶 전체의 계획까지도요.
메모장에 적어둔 계획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행히도 내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시간과 비용, 과정과 결과는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무력하지는 않게, 어떻게든 의지를 다해 노력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그것들을 해보려고 해요. 만약 또 어그러진다면, 또 지우고 다시 써보면 될 거 같아요. 마음처럼 되지 않아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시간도 마음도 리셋하고 아무 계획도 없었던 것 마냥 다시 삶을 계획해보려고 해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살아지겠죠. 어떻게든요.